"잘 부탁드립니다~!"
3월달, 벚꽃이 슬슬 피어나기 시작할 무렵. 텅 비어있던 벚나무들이 가득 찼던 교정은 올해 입학생들의 우렁찬 인사로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그 중 한 소년, 마츠카와 잇세이는 묵묵히 다시 한번, 봄을 맞이 하려 하고 있었다.
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흑빛 곱슬머리가 봄바람에 산들거렸다. 교실 맨 뒤쪽 창가 자리를 조용히 차지하고 앉아, 시끌시끌한 교실 분위기 속에서도 마츠카와는 가만히 턱을 괴고 창문 밖을 내다 볼 뿐이었다. 가끔씩 여학생들의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그런건 개의치 않는건지, 아니면 아예 눈치를 채지 못한건지 그는 멍하니 창문 밖만을 바라봤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마치 봄이 만개하기를 기다리듯이, 마츠카와 잇세이는 앙상한 나뭇가지 곁에서 그저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딩동, 하고 수업 종이 울렸다. 헐레벌떡 제 자리로 돌아가는 아이들 속에서도 마츠카와는 그저 제 자리를 지켰다. 시선은 아직도 창 밖에 고정한채. 책상과 의자의 마찰음이 교실 안을 울리고, 조용해진 학생들의 속삭임이 이내 차분해진 공간을 채워나갔다.
"문학쌤, 엄청 잘 생겼다는데 본적 있어?"
"응응! 입학식 조회때 그 분홍빛 머리 쌤 말하는거지?"
"나도 자세히는 못 보고 그냥 슬쩍 봤거든? 근데 엄청 훈훈하게 생겼던데~"
"야, 그런데 그 분홍 머리 염색인걸까?"
"그러겠지...? 엄청 밝아보였으니까."
교실 문이 드르륵 소릴 내며 꽤나 크게 열렸지만 마츠카와의 앞에 앉아있던 두 학생들은 계속 서로에게 속삭여 댔다. 선생이 이젠 비어 있는 교탁을 차지하고 섰지만, 마츠카와도 고개를 돌릴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창 밖을 바라보았다. 설마, 아직 꽃이 피기엔 이른 때니까.
"선생님이 들어왔는데도 딴짓이야?"
"..."
그 즉시, 실컷 떠들고 있던 애들도 입을 꾹 닫아 교실 안의 들뜬 분위기를 침묵이 대신 가득 채웠다. 짐짓 근엄해보이는 목소리에 마츠카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선생 쪽으로 마지못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자리엔, 한쪽 입꼬리를 장난스레 올리고 있는 어린 선생님이 서 있었다. 짧게 쳐진 머리에 둥근테 안경. 정말 여학생이라면 한번쯤은 좋아해볼, 순정 만화에나 나올법한 외모를 가진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그런 흑백 만화 주인공들과 한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바로 파스텔빛 분홍 머리 였다. 하라주쿠에서나 심심찮게 볼 그런 머리색깔이 아닐까.
"장난이야, 장난. 첫날부터 엄하게 시작하긴 다들 싫지?
조용해진 교실 안, 선생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웃음과 함께 퍼졌다. 마츠카와를 포함한 학생들은 모두 어리둥절 한채 그를 멀뚱히 바라보았고, 그 선생은 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 이름은 하나마키 타카히로. 올해부터 너희에게 문학을 가르칠 선생님이야. 잘 부탁한다." 돌아서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쓰는 그의 필체는 단정하면서도 지저분했다. 마치 중학생 티를 갓 벗어난 소년의 것처럼. 탁탁, 균일한 분필 소리의 리듬이 이상하게도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봄바람과 지독히 어울렸다.
"문학이 지루한 과목이라 생각할수 있어.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왜 그딴걸 배워야하지? 결국 단어 몇개의 조합이 뭐가 중요하다고, 왜 그런걸 배우는 걸까? 하지만 우린 단어 몇개의 조합을 위해서 문학을 배우는거야. 쉽게 생각해봐-"
분홍 머리라니, 지독히도 봄과 잘 어울리는 색깔이어서 마츠카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시야 한구석에 들어온건 가만히 꽃봉우리 하나를 틔워내는 나뭇가지였다. 창 밖 벚꽃나무에 내내 꽂혀있던 시선이 처음으로 그 남자에게 고정되었다. 하나마키의 입술이 움직이는 방법, 말이 끝날때마다 짓는 눈웃음, 가끔씩 치켜올리는 안경. 그에 대한 모든 것이 봄이라는 계절에 녹아드는것 같았다. 마츠카와는 미처 몰랐지만, 그 순간 그의 심장은 조금,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금,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음... 마츠카와 잇세이?"
"...네?"
갑자기 불린 이름에 마츠카와는 눈을 꿈뻑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두 쌍의 눈은 마주쳤다. 내가 뭘 잘못했나? 설마 정신을 놓고 있어서? 처음 보는 선생님에게 아무리 그래도 나쁜 인상은 남기고 싶지 않았다. 더더욱 그였다면.
"혹시 좋아하는 시가 있니? 없으면 괜찮고."
"아... 네. 음,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분위기에 휩쓸린건지는 몰라도, 마츠카와는 온 학생들의 놀란 눈빛들을 고스란히 받으며 천천히 시를 외워나갔다. 선생은 눈을 감고 그 목소리를 즐기고 있었지만, 마츠카와는 온전히 하나마키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 낮은 목소리로 언젠가 읽어보았던 시를 외워나갔다. 인터넷에서 스쳐 지나가듯 본 시였지만, 어딘가 마음에 들어 몇번이고 곱씹어 보았던 그 시를 외워나갔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정하 시인의 낮은 곳으로. 맞아, 좋은 시야. 혹시 시 좋아하니?"
약간 놀란 눈치 였던 하나마키는 결국 마지막 행을 마츠카와 대신 끝내갔다. 분명 교과서에서 본 시의 이름 정도만를 예상하고 있었겠지. 결코 이런 반응을 내다보고 있지 않았을것이다. 마츠카와는 계속 하나마키를 바라보았다.
"시를 좋아하는건 아니에요. 그냥 그게 좋았으니까요."
"그리고 그게, 문학을 배워야하는 이유야. 고작 단어의 조합 몇개가, 사람의 감정을 만들고, 사상을 피워내고, 사랑을 노래하고, 이야기를 담아내잖아. 그리고 모든 문학가의 아주 기본적 생각들을 살펴보면, 단 한가지 결론 밖에 나지 않아. 그들은, 그냥 그게 좋았다는것이지."
학생들은 이제 조용히 하나마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조곤조곤, 진지하지만 재미있게 수업을 풀어나가는 하나마키를 보며, 마츠카와는 새삼 그가 대단하다 생각했다. 어떻게 그리 편하게 우릴 대할수 있을까. 어떻게 문학을 그렇게 좋아할수가 있을까. 턱을 슬그머니 앞쪽으로 괴며 마츠카와는 칠판에 글을 쓰는 선생의 뒷모습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시야 한구석에는, 벚꽃 하나가 활짝 피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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