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UITS

[마츠쿠로] SUITS I

시험장 내에는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분명 몇십 번을 해봤잖아, 긴장 풀어라, 쿠로오. 하지만 눈을 꾹 감았다가 뜬 후에도 여전히 날카롭게 느껴지는 시험관의 시선에 쿠로오는 조금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딸깍딸깍, 불안한 볼펜 소리가 시간을 재촉하듯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험관의 시선은 점점 따가워지고 있었고, 애석하게도 초침은 점점 더 느려질 뿐이었다. 마치 누군가 시간을 일부러 조종하는 것처럼.


`설마 눈치챈 거야?`


불행 중 다행으로, 시험의 끝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고, 쿠로오는 까만색 야구모자를 더욱더 눌러쓰며 시험지를 앞에 두고 가라는 시험관의 말에 따라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시선은 바닥을 향한 채. 저기다 시험지를 두고만 가면 돼. 그러면 300달러 받는 거야.


고비가 눈앞이었다. 바로 앞에 보이는 산더미처럼 잔뜩 쌓인 종이 더미 위에 자신의 시험지만 올려두면 게임은 끝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시험지를 그 위에 올린 순간, 갑자기 잡힌 손목에 쿠로오는 급하게 시선을 앞으로 꽂았다.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은, 누구도 아닌 바로 그 따가운 시선의 주인이었다.


"당신, 나 본 적 있죠?"


눈치챘다.



W. 신유




"아하하…. 제가 누구 닮았다는 소릴 많이 들어서요…. 사람 잘못 봤습니다."

"저번 시험엔 분명 사와무라 군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어떡하지, 이번 일도 망하면 이번 달 월세 못 내는데. 등 뒤로 차가운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그 순간, 어벙하게 생긴 누군가 실수로 시험지를 떨어트렸고, 당연히 그 시험관의 관심은 그쪽으로 쏠렸다. 지금이다. 잡히지 않은 손에 들린 시험지를 무더기에 사이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빠져나가는 사람들 무리에 섞여 쿠로오는 금세 시험장 안을 빠져나왔다. 그 시험관이 관심을 쿠로오로 돌렸을 땐 이미 그는 없어진 지 오래였고, 이름을 몰랐기에 그 많은 종이 틈에서 섞여버린 그의 시험지를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자식이…."


급하게 바깥 복도에 고개를 길게 빼고 그를 찾아보았지만, 복잡한 사람들 속에서 까만색 야구모자는 코빼기도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시험관이 입술을 짓씹고 있는 동안, 쿠로오는 시험장 바로 옆, 남자화장실 쓰레기통 안에 그 야구모자를 구겨 버려버렸다.


복도에 아까 그 시험관이 없다는걸 몇 번이고 재차 확인하고서야 쿠로오는 조심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섞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눈에 띄진 않았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손을 들어 답답한 듯이 뒷머리를 박박 긁고 있는 그다.


일은 지시 받은 대로 끝냈지만, 수당을 받으러 가는 그의 발걸음은 전혀 가볍지가 않았다. 왜냐? 약속했던 180점이 아닌 고작 156점을 맞아 왔으니까. 후폭풍은 당연했다. 시험을 친 건물을 떠나 이제 어둑어둑해지는 거리를 걷는 쿠로오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한 손에는 로스쿨 입학 설명서를 든 채로. 또 한 번 300달러와 교환하는 양심이었다.


301호라 쓰인 문을 몇 번 두드리자, 얼마 있지 않아 불쾌한 냄새와 함께 충혈된 눈의 사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하란 대로 끝내왔으니까 300."

"몇 점?"

"...160."

"하? 약속했던 180이 아니라?"


머리가 띵하니 아파져 왔다. 하, 시험을 치기 전에 한대 빨고 가는 게 아니었는데. 초점을 잡으려 눈살을 잔뜩 찌푸려서야 쿠로오는 간신히 말을 이어나갈 수가 있었다. 흐릿하게 시야가 흔들렸지만, 그 남자의 인상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쉽게 볼 수가 있었다.


"SAT 1,800점을 간신히 넘긴 인간이, 어떻게 180을 기대하느냐고. 지금 160만으로도 감지덕지한 데."

"150달러."

"자, 잠깐, 뭐라고?"

"150달러라고. 딜은 딜이니까."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재차 물어봤지만, 눈을 한번 깜빡였을 땐 쿠로오의 앞에는 굳게 닫힌 문이, 그리고 손에는 잔뜩 구겨진 지폐가 들려있었다. 150달러라니. 500을 받아도 부족할 만할 일거리인데, 아무리 160점을 받아왔다 해도 400 정도는 받을만했다. 반의반도 받지 못한 금액에, 쿠로오는 그저 허망하게 닫힌 301호를 바라보았다. 다시 문을 두드려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다시 문전박대를 당할 것 같아 결국엔 발걸음을 무겁게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번 달 월세 어떡하냐…. 운동화 밑창이 카펫에 질질 끌리면서 싸구려 아파트의 그 노릿한 냄새가 유난히 강하게 풍겨왔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몰라도, 어질한 머리를 어떻게든 끌고 자신의 방에 도착했을 땐 그다지 반갑지 않은 풍경이 자신을 반기고 있었다. 저급한 심야 영화가 화면을 가득 메운 텔레비전, 온 집안을 꽉꽉 채운 싸구려 팝콘 냄새, 그리고 스프링이 다 나간 소파에 반쯤 누워 자신을 향해 헤실헤실 비죽거리고 있는 저 쓰레기.


"여어~ 쿠로!! 오늘 시험은 어땠냐?

"인제 그만 빨아대야겠더라. 전의 내가 아니야."


“그러니까 나랑 일하자고. 그런 거 그만두고.”


저 말은 도대체 몇 번을 들었던 걸까. 초등학교 3학년, 수학 시험을 대신 치러주고 만점을 받아줬을 때부터 꼬박꼬박 들어왔었던 말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무시해왔던 말. 지긋지긋하지도 않나. 오븐을 뒤져 3일 전 먹다 남은 피자를 꺼내먹으면서도 아직 머릿속에서는 약 기운이 가시질 않았다. 


“…안 해. 그런 일 이제 안 한다고 몇 번을 말하냐.”

“워워, 날 뭐로 생각하는 거야!! 나 진짜 소프트웨어 클라이언트도 있고, 높으신 분들한테 묵직한 서류가방 하나만 전해주면 돈이 굴러들어오는 게 이 바닥이라고. 야, 내가, 이런 양복이 옷장에만 여덟 벌이야.”


흘끗 바라본 그는 자신의 소매 단추를 매만지며 재수 없게도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랑 일하자고. 안 그래도 네가 할만할 일이 딱 들어왔는데, 어떠냐? 어, 친구 한 번만 돕는 셈 치고. 엉?”


이상하게도 그 먹다 남은 피자는 입안 쓴맛만을 가득 남겨놓았다.


“뭔데.”

“저기 있는 서류가방, 힐튼 호텔 1204호로 배달. 그리고 수당도 두둑해, 2만5천.”

“야, 2만5천이 누구 집 개 이름이냐?”

“진심인데? 그리고 전부 네 거라고."


순간 구미가 확 당겼다. 2만5천이라니. 그 정도면 월세는 물론이고 생활비는 몇 달 치를 충분히 낼 수 있어. 하지만 이젠 정말로 그만둘 때였다. 언제까지나 약에 빠져 살 순 없었으니까.


“…그래도 기각. 다른 사람이나 찾아봐.”

"체, 그래도 생각 바뀌면 언제나 전화해라."


그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자 오래된 스프링에서 기괴하게도 끼익 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마치 더러운 곳에 몸을 뉘었다는 듯이, 불쾌하게도 자신의 양복을 툭툭 터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지만 어쩔까. 지금 이 집도, 이 옷도 전부 그가 대주는 거였으니까. 그의 손에서 짤랑거리는 페라리의 열쇠가 못내 아니꼬웠다. 돈이 부러운 게 아니라 그저 그의 태도가. 


"그럼 내일 보자, 쿠로!!"


빙글빙글 웃고는 문 너머로 사라진 그의 옷자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 근데 2만5천이면 진짜 장난 아닌데…. 그 생각을 하니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와 무의식적으로 혀를 내어 입술을 적셨다. 하아…. 진짜 눈 한번 꾹 감고 마지막으로 할까? 


갑자기 바지 뒷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려왔다.


"네, 나카지마 선생님. 웬일로 전화를-…. 네- 네? 하…. 할머니가요?"


쿠로오의 얼굴에서 평소의 장난스러운 미소는 싹 지워져 있었다.